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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꾸는 꿈은 아무리 그 꿈이 크다 할지라도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릴 때 꾸는 꿈과 어른이 되어 꾸는 꿈은 그 성격 자체가 다릅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현실의 범위와 한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게 뻔한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입니다.


꿈은 꿈을 꾸는 자의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삶은 날개가 부러져 땅바닥에 앉아 굶어 죽어가는 새와 같습니다.
한 번 꾼 꿈은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꾸준히 추구해야 합니다.
꿈은 어쩌면 꿈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추구하지 않는 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자기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것을 멍하니 매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해보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분명 그것을 할 수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인생은 젊을 때 어떠한 꿈을 어느 정도 꾸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루살이로서 살아갈 시간이,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데 비가 오면 어떻습니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하루종일 비가 와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저도 그 하루살이의 마음이 되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삶과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참 다릅니다.
목표를 세우지 않은 사람은 목표를 세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진정 되고 싶은 무엇이 있으면 일단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하지 말고 꾸준히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를 내가 따라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목표가 나를 이끕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능력이란 가만히 있는데 미리 주어지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시련과 실패는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련과 실패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은 어떠한 일을 하는 동안 닥치는 난관과 이루어지며, 실패는 시도한 어떤 일의 상황이 끝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련이 과정이라면 실패는 그 과정의 결과입니다.
시련은 극복의 대상이며, 실패는 낙망과 절망의 원인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패도 또 하나의 과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삶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삶에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만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과정에는 여러 갈래 가능성의 길이 숨어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시련을 실패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패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가 아닙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떠한 불행을 당하더라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불행이 아닐 수 있으며,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물건들이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 역시 꿈에 속합니다.
꿈이 있기 때문에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도해보지 않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실패한 게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속엔 크고 작은 실패가 수없이 숨어 있습니다.


기회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두려움과 망설임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가장 큰 실패는 어쩌면 시도해보 용기조차 지니지 못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한계라는 것은 어떤 물체나 상황처럼 제 눈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 골인 지점처럼 미리 정확하게 규정돼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저 제 마음속에서 생겨난 관념의 복합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추진해나가던 어떤 일에서나 가까운 이들과의 인간관계에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곧잘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것이 한계가 아닐 수도 있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또 다른 활로가 생겨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할 수 없다고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 실은 바로 그때가 그 일이 정점에 도달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그 일이 쉬워질 수가 있는데도 우리는 그 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느껴질 때 30분만 더 참고 견뎌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30분이란 시간의 단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더 참고 견뎌보라는 인내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중도에서 포기할 만큼 힘든 상황이라도 기다림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인내라는 용기를 가지고 더욱더 노력해보라는 뜻입니다.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고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무겁게 여기고 들면 가볍고, 가볍게 여기고 들면 무겁습니다.


인내야말로 성공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은 참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천재도 단지 오랫동안 고생을 참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를 대신할 수있는 것이 재능일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오늘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이유는 바로 인내의 결핍 때문입니다.
더 이 상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될 때 30분을 더 참고 견디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처 없는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분입니다.
따라서 상처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기를 바란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넘지 않 으면 안 되는 에베레스트가 있다면,
그것이 비록 상처의 에베레스트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기 발로 걸어서 넘어야 합니다.

저는 그때 포기한다는 것도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꾸준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하는 일이 잘 안 될 때, 더 이상 노력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잠시 손을 놓고 쉬거나 뒤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길은 다양합니다.
다양하지 않으면 인생이 아닙니다.
생각한 대로 되는 게 인생이지만,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인생입니다.
특히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포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꿈의 크기가 삶의 크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꿈의 크기를 수정하거나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리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해보다가 포기합니다.
포기하기 전에 내가 최선을 다했는가 살펴보고 포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포기할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포기는 새로운 일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할 줄도 아는 일입니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등 뒤에 열려 있는 문은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의 이 말은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거나 상호아이 너무 암담하면 다른 쪽 문을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닫힌 문 때문에 비탄에 잠겨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은 한쪽 문을 열어놓지 않고는 절대로 다른 쪽 문은 닫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제 삶이 힘들 때는 '이제는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때부터 실뭉치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풀리는 실로 어떠한 옷을 새로 짜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게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저는 언제 어느 순간에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인생이 아닙니다.
저는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잃었던 힘을 되찾곤 합니다.



물론 인생에는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어느 일은 그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를 놓쳐버리면 영영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놓쳤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인간의 힘은 스스로 원하는 만큼 강해지는 법입니다.


세상에 일정하게 정해진 삶의 표준이나 기준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고정된 유형도 없습니다.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착각할 뿐입니다.
혹시 내게 불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불행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알아야 내가 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나만 불행하고 이렇게 못 사느냐, 왜 나만 부모 복이 없고 자식 복도 없느냐' 이렇게 생각하면,정말 남편 복도 아내 복도 자식 복도 친구 복도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비극이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라!
우리가 다 아는 채근담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복이지 내 행복의 기준치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서 내 행복의 모양새를 스스로 갖출 수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의 삶을 흉내 내면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이 장에 간다고 나도 거름 지고 장에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남의 기준에 맞추어 남의 삶을 베끼려 하지 말고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한테나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라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누구한테나 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이해관계가 없어도 사람은 사람을 욕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욕하는 일은 이미 늘 있는 일입니다.
다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예, 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먼저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태도는 그 당시에는 좋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정과 사랑과 신뢰를 잃게 됩니다.


한 마리 개가 물체를 보고 짖으면 다른 백 마리는 개는 그 소리를 따라 짖습니다.
삶이란 누구를 따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자기만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잘 모릅니다.
어떤 때는 따라만 하는 게 아니라 비교까지 합니다.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평가합니다.
특히 외모와 물질일 경우의 평가는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듯이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그뿐입니다.
지나간 1분은 세상의 돈을 다 주어도 사지 못합니다.


시간은 그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질 뿐입니다.
시간이 바로 인간이며, 시간이 바로 인생입니다.
인 생은 두루마리 휴지와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더 빨리 없어집니다.
우리는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화장지를 다 써버린 줄 미처 모르고 당황해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의 목숨이 다한 순간입니다.


볼펜을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써야 할 때 잉크가 떨어져 쓸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볼펜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립니다.
우리의 인생도 볼펜에 든 잉크처럼 정작 중요한 때에 시간이 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 생은 아침이슬과 같고, 부싯돌의 불꽃럼 짧은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마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으며, 과녁을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이야말로 바로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은 결코 나를 위해 기다려 주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렸다가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이 참으로 소중한 것은 그런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며, 기다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이에게 시간은 자신을 헌신합니다.


『탈무드』에서는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간은 멈추어 있을 뿐, 흘러가는 것은 인생' 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은 이미 영원히 현재에 존재하고 있을 뿐, 다만 사라지는 것은 나의 인생일 뿐입니다.

저는 실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정말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삭막해질 것입니다.

실수 속에 웃음의 꽃이 피고 여유의 강물이 흐릅니다.
실수 속에서 평범한 인간의 인간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나도 저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그러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한 실수가 마치 내가 한 실수처럼 느껴져 "으하하" 웃음보를 터뜨립니다.


큰 실수도 작게 보면 작아집니다.
작은 실수도 크게 보면 커보입니다.
그렇지만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실수, 만남과 결혼과 건강에 대한 실수는 가능한 한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쩌면 신도 실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 내가 실수했구나' 하고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실수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하나씩 공평하게 지니고 태어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도 미모도 돈도 아니고 바로 재능입니다.
누구나 신으로부터 한 가지씩의 재능을 부여받고 태어나는데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재능을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 그것을 열심히 잘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재능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 재능이 꽃피는 게 아닙니다.
재능에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노력 없는 재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땅속에 있는 금도 캐내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란 그 금이라는 재능을 캐내는 것입니다.

노력이 재능입니다.
재능도 값진 것이지만 정말로 값진 것은 노력입니다.
노력이 재능이고, 소질이며, 연습의 양이 질입니다.
노력만이 타고난 천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운명은 노력하는 인간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노력한 이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이들은 모두 노력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쉬워야 영혼이 눈을 뜨고 숨을 쉽니다.
부족해야 지혜가 눈을 뜨고 마음이 진실해집니다.
진정한 결핍이 있어야 그것이 곧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인생은 좋은 곳에 안주해서 녹슬어버리는 것보다는
고통의 모서리에 닳고 닳아 없어지는 게 더 낫습니다.


하나가 더 있다고 해서 사는 게 더 편안해지는 게 아닙니다.
둘을 지녔다고 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만족감과 행복감이 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다는 것이 곧 만족스러운 삶을 보장해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목숨이 하나라고 둘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아내가 하나고 남편이 하나라고 둘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둘을 지니면 반드시 그 둘마저 잃게 됩니다.


아마 하나가 있기 때문에 둘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약한 인간인 우리는 그 하나마저 버리기가 힘이 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둘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 두 그릇을 먹지 말고 한 긋은 남이 먹도록 남겨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튿날 아침에 나 자신도 다시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요,
남에게 주어버린 것은 영원히 내 것이다.'
이 말을 『숫타니파타』에서 읽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남의 불행이 저에게는 큰 감사와 교훈이 됩니다.
오늘의 제 자신을 돌아보고 긍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저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사는 이들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가능한 한 저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저의 기쁨조차도 슬프게 만들어 버립니다.
저의 작은 행복조차도 큰 불행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를 갑자기 초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래를 바라보면 볼수록 제 삶이 감사하고 힘이 생깁니다.
그들이 곧 제 살의 스승이다 싶어 갈수록 그들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인생이 괴로운 것은 크고 작은 분노를 비켜갈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분노의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기만입니다.
한평생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미움과 분노를 어떻게 삭이고 다스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분노의 감정이 저의 강인함의 표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나약함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통해서 그래도 많은 것을 얻은 줄 알았으나, 얻은 것은 또 다른 상처만 얻었을 뿐입니다.
'복수심을 마음에 품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동안 지닌 복수심으로 제 가슴만 더욱 파괴되었을 뿐입니다.


미움을 통해서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분노를 통해서는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만이 분노를 삭일 수 있으나, 용서가 그리 쉽지 않은 우리에게는 세월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식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영원히 짝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들이 집을 나가면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아드을 기다립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식은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원형의 경마장을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쫓아가면 갈수록 자식은 부모한테서 멀어져갑니다.
하지만 자식을 쫓아가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으면 멀어져갔던 자식이 자연히 부모가 서 있는 자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남에게 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비로운 마음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마음만 있다면 남이 나에게 잘못해도 얼마든지 질 수 있습니다.
꼭 이겨야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꼭 이겨야 행복한 줄 알지마, 남을 누르고 남보다 앞장서야 행복한 줄 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는 이에게도 이기는 이에게도 이김의 기쁨과 안식을 주는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짐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좌절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했다는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이기기만을 원한다면, 누구나 다 앞장서기만을 원한다면,
아무도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나를 이기기 위해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친다 할지라도,
나를 앞장서기 위해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할지라도
지거나 뒤처진 자에게도 나름대로 기쁨은 있습니다.


가장 큰 승리는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남에게 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이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남에게 지는 사람이 가장 용맹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인격이란 눈물과 비극을 처리하는 아량'이라고 한 말에 공감했습니다.
불행과 절망, 눈물과 비극을 이겨내는 마음의 힘, 또는 마음의 크기가 바로 인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크기가 똑같은 인격이라는 그릇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태어나게 했습니다.
신은 그 그릇에 기쁨보다는 슬픔을, 행복보다는 불행을, 웃음보다는 비극을 담으라고 그 그릇을 주었습니다.
인격이란 결국 참고 견디기 어려운 눈물을 평생 동안 담으라고 준 그 그릇을 말합니다.
그릇이 크면 클수록 눈물이 담기는 양도 많고, 적으면 적을수록 그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바로 인격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얼마나 잘 견뎌내었는지에 따라 사람의척도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극과 눈물 없이 지낸 인생은 편안한 인생은 될 수 있어도 훌륭한 인생은 되지 못합니다.
눈물과 비극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반쪽은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내 삶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줄 알지만 가능한 한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소유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리 빠른 것은 아니지만 너무 빨리 삶을 잃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신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장 먼저 꺾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너무 빨리 꺾여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매달려 있어도 안 됩니다.


인생은 어느 곳에서 출발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곳에서 끝마쳤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삶의 평가는 죽음을 맞는 태도에서 내려집니다.
인간은 선한 삶을 살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집니다.
나뭇잎은 땅에 떨어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뭇잎은 겨울이 올 때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진 낙엽은 차디찬 겨울의 땅 위에 나뒹굴며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꽃도 그렇습니다.
활짝 피어 있는 것만이 꽃이 아니라 시들시들 지고 있는 것 또한 꽃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죽어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죽음은 오늘 하루하루를 충만히 사는 것입니다.
  • ?
    지현정 2010.09.16 09:33
    ^^ 틀에 짜여진 일상에서 최소한 누릴수있는 변화를 모색하고
    그럴수 있는 단 10분의 여유를 감사히 여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날그날의 날씨를 만끽하고
    보잘것 없는 사물에 애정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저 온전한 내 몸하나에
    한없이 즐거울수 있길 바랍니다 ^^
    아~ 제가 가을을 타나요,,, 헤헤헤
  • profile
    apple 2010.09.20 17:54
    삶이 힘들때는 실 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고요.
    실 뭉치가 풀리때까지 얼마나 길고긴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아시는지요.
    인생에 힘이 되어준 글 들이 소중 했읍니다.
    박교선 씨 이름 박교수님으로 바꾸면 어떠할지 !
    정말정말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