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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사진마저 가짜라는 논란이 일어
삭제했을 정도다. 최근에도 115년 전 러시아의 한 신문에 실렸던 세밀화가 공개됐지만 중국식
복장과 머리장식에 얼굴은 다분히 서구적이라 거의 상상화에 가까운 것 같다.

구한말 당시 한국에 머물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나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등이 글로 명성황후의 용모를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그녀임을 입증하는 사진이
나 그림은 아직 없다.

     

#대신 명성황후의 글씨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예부터 글씨는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특별전-붓길, 역사의 길’에
서 명성황후가 조카의 결혼을 축하하며 쓴 오언축시(五言祝詩)의 휘호를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은하수는 수천 물결로 출렁이고/ 옥수에 수많은 가지는 봄이어라/ 이것으로 우리 누이를
축하하며/ 양전(고종과 명성황후), 기쁨에 젖는다(銀潢千派遠 玉樹萬枝春 以玆祝吾妹 兩殿喜
歡新).”
                                          < 명성황후의 글씨... 추정가 2억 >
    

#글 내용도 좋지만 색색의 화선지 위에 정갈하게 써 내려간 명성황후의 필체를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획 한 획에 어김이 없고 특히 외자로 쓴 ‘신(新)’자는 명징하고 단호하다.

“약간 창백하면서도 꽤 가는 용모에 뛰어나면서도 뚫어보는 듯한 눈을 가졌다”고 언더우드
박사 부인이 명성황후를 묘사했던 것과 너무도 닮았다. 하지만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히
시해된 그녀의 혼령이 그 글씨 한 자 한 자에 어른거리는 듯해 애잔한 마음 가눌 길 없다.

                     < 우장춘 박사 >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으로 말년을 살다 간 고영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본래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지낸 무관이었지만 끝내 자객이 됐다. 1903년 자객 고영근
의 칼 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조선훈련대의 대대장이었던 우범선에게 꽂혔다.

우범선은 사전에 극비 정보를 일본에 넘기고,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 그들을 대적하기는
커녕 그들에게 동조한 인물이요, 심지어 명성황후의 시신마저 궁궐 뒤편에서 소각한 장본인이
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인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살았는데 장남이 바로 그 유명
한 육종학자 우장춘이다.

                               < 고영근 >

#해방 후 귀국한 우장춘은 우리말을 전혀 못했지만 식량 증산에 도움이 될 육종 연구에 매진
했다. 강원도 감자, 제주도 귤 등이 모두 그의 노력으로 개량됐다. 그 우장춘의 넷째 사위가
교세라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제계의 거목이요 축구선수 박지성이 J-리그 교토 퍼플산가에서
뛸 때 그 클럽의 구단주였다. 2002 한·일 월드컵 후 박지성이 히딩크가 있는 에인트호번으로
옮기려 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직접 박 선수를 만나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박 선수가 에인트호번행을 고집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오히려 흔쾌히 박지성의 환송회
를 열어주고 그 자리에서 “박지성군, 언제든 돌아온다면 환영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그를
아꼈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과 그에게 복수의 칼을 꽂은 능참봉 고영근.
우범선의 아들 육종학자 우장춘과 그의 사위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 나아가 이나모리가
아꼈던 대한민국 축구의 별 박지성…. 지난 세월 역사의 뒤편에서 묘하게 이어져 온 인연의
고리다. 어찌 보면 악연이 반드시 악연을 낳지는 않는 것 같다.

이제 악연이 낳은 ‘국치(國恥) 100년’을 접고 새롭게 선한 인연의 ‘번영 100년’으로 나아갈 시점
이다. 미래의 ‘한국과 일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럴 수 있길 희망하고
기대해 본다. 비록 명성황후의 사라진 얼굴처럼 모든 것을 원래 그대로 복원할 순 없을지라도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미래의 얼굴은 우리 스스로 다시금 멋지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