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피어나는 워싱턴 D.C를 달리다.
벚꽃과 복사꽃, 개나리꽃이 수줍은 듯 피어나기 시작하는 워싱턴 시내를 아직도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달린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정원과 같은 계획도시,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빌딩이 잘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 세계의 근,현대사를 쥐락펴
락하는 그 엄청난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도도히 흐르는 포토맥 강과 대지에 흐르
는 커다란 기가 온 몸으로 전해온다.
나는 오늘 쌀쌀한 날씨지만 굳이 아주 짧은 런닝 팬츠를 입었다. 피부로 하는 호흡을
하고 싶어서였다. 호흡기관을 통한 호흡만이 아니라, 온 몸의 기공을 열어 봄이 가
져다 주는 생명의 기운을 맘껏 흡입하고 싶었다.
나무들은 용하게 봄의 기운을 빨아들인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상큼하다. 새들
도 지저귀며 솟구쳐올라 암수가 서로 희롱을 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간다. 나도
오늘 워싱턴에 떠도는 봄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봄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싶다.
봄기운에는 오묘한 생명의 조화가 숨어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에도 어김없이 공짜
는 없다. 이 계절 뭇 생명들은 봄의 복락을 더 누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적당한
경쟁을 통해 자연과 사람들은 더욱 건강해진다. 자연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상생의
지혜를 갖는다. 생명의 본래의 모습은 상생과 평화이다.
R.F.K 메모리알 스타디움에서 약 2만여 명이 Capital 스트릿을 지나 Constitution 애브뉴
를 지나 봄 꽃을 찾는 벌,나비처럼 수를 놓으며 달려갔다. 미술 박물관과 연방 법원 그리고
워싱턴 모뉴멘트, 국회의사당이 옆으로 보인다. 이렇게 워싱턴의 속살을 벌,나비가 꽃잎을
보듬듯이 보듬으며 달리는 기분은 특별하다.
제국의 심장에서 느껴질 만한 위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독립이래 지구상 어디에선
가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평화롭게 달리는 심정이 묘하
게 가슴에 울려온다.
도시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흑인 빈민가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도시,
지금도 어느 한 구석에선 반전대모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나는 건물마다 어느 곳 하나 휘두
르는 힘이 작다고 할 수 없는 정부기관, 각국의 대사관이나 금융기관, 무역협회와 직능단체들
이다. 대표적인 계획 도시인 워싱턴 D.C는 도시간에 흐르는 천지간의 기와 바람의 소통을 위
하여 국회의사당보다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오늘 역사적인 기념물들이 가득한 도시를 달리는 전반 Half 내내 “오바마 대통령이 자주
찾는 햄버거 가게는 어디일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특별한 오락을 위해서 트렁크에 숨어서 가
던 곳이 어딜까?”같은 주간지 가십거리만 떠올렸다.
후반 Half는 다리를 건너 포토맥 강변을 따라 달리는 코스가 또 일품이었다. 한가한 유람선과
카약, 그리고 물새들, 또 그 옆을 한가롭게 달리는 마라토너들, 모두들 평화스럽다.
이런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 재앙이겠구나 생각했다. 무엇보다고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가
평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를 깨뜨리는 재앙은 자연의 재앙, 문명의 재앙, 인간의 재앙이 있
다고 한다. 자연의 재앙은 우리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문명의 재앙, 인간의 재앙은 평화로운
새 세기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한가롭게 벚꽃이 피어나는 포토맥 강변을 달리며 얼마 전 일본의 한가로운 바닷가를 쓸어버리
는 쓰나미의 화면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고, 문명의 재앙인 원자력 발전의 사고가 자꾸 암담한 상상
을 하게 했다. 지금도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포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2만여 명이 워싱턴을 누비며 달리는 오늘 마라톤 대회는 내게는 평화의 행진으로 가슴에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