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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러너 카나구리 시조
 

세계최저기록 남긴 日마라톤 대부 |


[카나구리 시조 일본│1891. 8. 20 ~ 1984. 11. 13]
세계마라톤사의 오랜 옛날 얘기를 들춰보면 참 황당한 일화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마라토너 카나구리 시조(金栗 四三)가 세계최저기록 54년 8개월 6일 5시간 32분 20초를 작성한 이야기는 특히 재미있다. 말도 안 되는 이 기록만 보더라도 뭔가 ‘기구한 사연’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을 텐데, 미리 밝혀두지만 카나구리 시조는 단순히 헤프닝의 주인공으로 기억될 만한 시시한 인물이 아니다.
카나구리 시조는 1891년 쿠마모토현 타마나시에서 태어나 1910~1920년대에 활약한 일본 마라토너다. 당대 일본 최고의 러너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세계기록을 앞서며 올림픽 제패를 노렸던 세계적인 선수였다. 때문에 1912년 스웨덴에서 열린 제6회 스톡홀름올림픽에 참가할 당시 그가 세계최고기록 대신 세계최저기록을 작성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오히려 다른 참가자들을 긴장케 하는 유력한 메달 후보였다.

불운의 연속, 그리고 전설의 시작
올림픽 참가를 위해 일본에서 스웨덴까지 간다는 것은 당시로선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기차와 배를 타고 20일 동안이나 가야 했다. 스웨덴에 도착해서는 백야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 더욱이 쌀을 먹지 않는 곳이라 음식 섭취에 문제가 많았다.
결정적으로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원래 스웨덴은 북유럽 국가라 대회가 열린 시기엔 서늘해야 하는데 때 아닌 이상기온 현상으로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찜통더위가 찾아왔다. 설상가상으로 대회 당일엔 경기장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자동차가 오지 않아서 별 수 없이 뛰어서 경기장에 가야 했다.
이날 마라톤 경기는 그야말로 지옥의 레이스였다. 끔찍한 무더위 때문에 68명의 선수 중 34명이 기권했고, 그중 1명은 열사병에 걸려 다음날 사망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레이스였던 것이다.
카나구리 시조도 고전하긴 마찬가지였다. 더위만도 버거운데 대회에 앞서 컨디션을 망쳤으니 경기가 잘 풀릴 리 없었다. 어떻게든 완주를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후반부에는 체력이 고갈되어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33.3km 부근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다행히 길을 지나던 주민에게 발견되어 근처 농가로 옮겨져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카나구리 시조는 크게 낙심했다. 경기 중 정신을 잃은 것도 모자라 경기가 끝난 다음날까지 누워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그는 다른 선수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해 숙소로 복귀하지도 않았다. 결국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54년 8개월간 끝나지 않은 마라톤
한편 대회 주최 측은 기권하지도 완주하지도 않은 일본 선수 카나구리 시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했다. 레이스 도중 허기를 달래기 위해 농가로 찾아들어간 뒤 그 길로 레이스를 중단하게 됐다고 판단했지만 어쨌든 운영요원이나 심판이 정황을 확인한 바가 없기 때문에 ‘기권’으로 처리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주최 측은 그를 레이스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귀국한 카나구리 시조는 스웨덴 올림픽의 아픔을 잊고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1920년 벨기에에서 열린 안트베르펜(앤트워프)올림픽에 참가해 16위에 올랐다. 그는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기권)한 뒤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선수시절 못 다 이룬 꿈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일본 마라톤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1967년 3월. 노년이 된카나구리 시조에게 스웨덴올림픽위원회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올림픽 개최 55주년 기념행사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초대장에는 ‘당신은 마라톤 경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으므로, 골인하러 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올림픽 기록에서 ‘기권’은 있어도 ‘행방불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경기를 마쳐야 한다는 것.
이 초대에 응한 카나구리 시조는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주로에 섰다. 올림픽위원회는 그의 나이를 감안해서 트랙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완주를 인정해주기로 했고, 양복에 코트를 걸친 카나구리 시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장내 방송은 “일본의 카나구리 선수가 54년 8개월 6일 5시간 32분 20초 만에 지금 막 골인했습니다. 이로써 제5회 스웨덴 스톡홀름 하계올림픽대회의 전 일정을 모두 마치겠습니다”라고 감동적인 종료 선언을 들려주었다.
카나구리 시조의 이 역사적인 골인은 올림픽 마라톤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전무후무한 마라톤 최저기록, 최고령 마라톤 완주선수, 정장 차림에 코트를 입고 결승점을 넘은 선수, 다섯 명의 손자를 둔 할아버지 선수 등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기록들이다.


평생을 마라톤 발전에 헌신한 국민영웅
카나구리 시조는 일본인들에게 ‘일본 마라톤의 아버지’로 불린다.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일본 마라톤 기술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신년 최대 스포츠행사 ‘하코네역전마라톤’의 창시자로, 마라톤 신발의 진보를 앞당긴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4년 11월 13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 2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그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사카 중앙구에 위치한 일본 최대크기의 제과회사 광고판인데, 1935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광고모델로 쓰이고 있다. 그는 만년에 고향 쿠마모토현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쿠마모토현민종합운동장의 애칭인 ‘KK 윙’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 전통신발 다비와 마라톤
그리고 카나구리 시조

과거 일본의 마라톤 선수들, 혹은 일제시대 우리나라 선수들(손기정 등)의 과거 사진을 보면 앞쪽이 갈라진 독특한 형태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버선(혹은 실내화) ‘다비(足袋)’를 마라톤에 적합하도록 만든 ‘마라톤 다비(マラソン 足袋)’다. 아시아 마라톤의 비밀병기로도 불렸던 이 독특한 신발이 카나구리 시조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 육상 초창기 선수들부터 우리의 국민 영웅 손기정 선생까지 신고 뛰었던 마라톤 다비에 대해 알아보자.


조리와 게타를 신기 위한 ‘전통 버선’
일본인들은 과거 고온다습한 기후에 맞게 조리(짚신)나 게타(나막신) 등 발등을 노출하는 신발을 신었는데, 이런 신발들은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우는 형태이므로 그에 맞는 버선 ‘다비’를 신었던 것이다.
통상 다비라고 하면 양말 내지 실내화 역할을 하는 신발인데, 이를 변형하여 일을 할 때도 신을 수 있도록 고무 밑창을 덧댄 것을 ‘지까다비(地下足袋)라고 부른다. 버선처럼 유연하면서도 발바닥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어서 신발을 신는 것보다 일하기에 편하다. 작업화 혹은 노동화라고 할 수 있다.

카나구리 시조가 ‘마라톤 다비’ 고안해
전통신발 다비를 운동선수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최초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선수들이 작업화 지까다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02년 무렵 일본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학생들이 맨발로 달리는 것을 금지하자 선수들이 실내용 다비 혹은 지까다비를 신고 시합을 치렀다고 한다.
카나구리 시조 역시 다비를 신고 달리는 선수였는데, 달리면서 불편했던 점을 보완해 장거리 달리기용 다비를 탄생시켰다. 그는 바닥창이 얇고 발목 부분이 많이 올라오는 디자인의 지까다비를 바닥이 두껍고 발목 길이가 낮은 형태로 변형시켰다. 물론 당시에는 신발이 장거리 주행을 견디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뒀기 때문에 쿠션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른바 ‘카나구리 다비(金栗 足袋)’이며, 그것이 우리가 사진 속에서 보는 마라톤 다비의 원형이다.

서양 러너들도 탐낸 일본마라톤 전략무기
이 신발은 숱한 일본 선수들이 신고 뛰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와 1951년 보스톤마라톤 우승을 일궈낸 다나카 시게키(‘마지막 다비 러너’로 불림)도 신었다. 지금이야 뛰어난 기능의 마라톤화들이 많지만 전 세계적으로 스포츠화가 변변치 못하던 시절에는 일본만의 특화된 전략 무기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미국 등 육상 선진국의 러너들도 동양인 선수를 보면 마라톤 다비를 구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다비는 독특한 외형도 화제가 됐다. 미국 기자들은 다비의 겉모습을 보고 일본인의 발가락이 2개밖에 없는 줄 오해하기도 했다.
마라톤 다비는 일본에 서양식 신발이 도입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됐지만 최근엔 엄지발가락을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이 신발의 가치가 재조명돼 현대적인 기술로 재탄생하고 있다.

발췌 : 런닝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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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으로 2011.01.17 02:34
    전무후무 할 기록입니다.
          잘 보앗습니다.

                  때앵 
             ㅡ '' Q " ㅡ 
                입니다